소도시로 세금 몰리게 한 '일본의 놀라운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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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향사랑기부 댓글 0건 조회 70회 작성일 25-03-25 14:03본문
행정학 이론 중 티부 모형(tiebout model)이라는 가설이 있다. 만약 지자체가 독자적인 조세 징수권을 보유하게 되면, 지역마다 세금의 종류와 금액이 달라진다. 따라서 유권자는 자신이 원하는 지역을 고르려고 할 것이고, 지자체들은 더 적은 비용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유권자가 살 지역을 직접 선택한다는 뜻에서 '발에 의한 투표 모형(voting with feet model)'이라고 부르는데, 현실에선 제약 조건이 많아 적용하기 힘든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모형을 응용해서 주민이 세금을 낼 곳을 직접 정하도록 설계된 제도가 있다. 일본의 고향납세(ふるさと納税)다.
고향납세란 개인이 지자체를 특정해 납세(기부)할 경우, 세금을 감면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인구 감소로 지자체 세수가 줄어들어 지방재정이 힘들어지자,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제도화(2008년)됐다. 2000엔을 초과하는 기부액에 대해 소득세(국세)와 주민세(지방세) 공제 혜택이 주어진다.
기부처가 제공하는 답례품도 받을 수 있다. 지자체는 기부액의 3할이 넘지 않는 선에서, 기부자에게 지역 특산품을 선물한다. 기부자는 절세와 답례품이라는 편익을 얻고, 기부처는 곳간 사정이 좋아져 행정의 질을 높일 수 있게 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식이다.
아래 그림은 2008∼2023년 동안의 고향납세 건수 및 기부금 총액을 나타낸 것이다. 빨간색 선이 건수, 파란색 막대가 금액이다.
2023년 기준으로 건수는 5894만 건이고, 금액은 1조 1175억 엔이다. 한화로 11조 원이 넘는 큰 액수다. 초기 5∼6년간 큰 변동이 없다가 2013년을 기점으로 큰 폭의 신장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최초의 고향납세 민간 플랫폼 후루사토초이스(ふるさとchoice)를 운영하는 트러스트뱅크의 카와무라 켄이치(川村賢一) 대표는 고향납세 제도가 활성화된 배경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① 세금 혜택과 답례품 제공 ② 정부의 제도 개선 노력 그리고 ③ 시장 개방(2012년)이다.
고향납세는 기부한 돈 대부분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일본 납세 제도는 공제(控除) 혜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세액공제'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고향납세가 급여 생활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섰을 것이다. 초기에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답례품(reward)이 제공되면서 인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세금 공제 한도액을 늘리고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는 등 정부의 촉진 정책도 제도 활성화에 기여했다. 오프라인 중심의 공공사업으로 진행되던 사업이 별 진전이 없자 일본 정부는 시장을 개방했다. 민간 플랫폼사업자들이 참여하면서 선의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것 등이 더해져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결과라는 해석이다.
수도권 세금 줄고 소도시 세금 늘고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공제액이 늘어나면서 기부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주민세가 줄어드는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코하마(横浜)시의 경우, 2022년도에만 230억 엔(한화 약 2000억 원) 가까운 세수가 감소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도쿄도를 포함한 수도권과 대도시권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고향납세 제도는 '저쪽에 기부하면 이쪽에 납부할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이는 예견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보이는 손(정부)이 개입하면 반발이 클 것이므로 기부자의 손을 빌려 수도권에서 지역으로, 대도시에서 소도시로 재정(세금)을 이전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지자체 간 모집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관심의 초점이 양이 아니라 양털로 이동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제도의 취지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양)의 발전을 위해 기부하라는 것인데, 기부자의 행동이 답례품(양털) 선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고향납세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낮아 정부 교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자체들은 자주적으로 쓸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되는 사업이므로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최근에는 기부자들을 교류인구, 관계인구, 정주인구로 바꾸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교류인구란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왕래하는 인구를 말하며, 관계인구란 주민은 아니지만 지역에 애착을 느끼고 귀속 의식이 있는 집단을 지칭한다. 기부자에게 답례품을 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역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주를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접근법이다.
고향납세는 실제로 지역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① 홋카이도 중앙부에 위치한 유바리(夕張)시는 인구 60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소도시다. 석탄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 감소와 재정난으로 파산(2006년)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고향납세 시행 이후 약 30억 엔(한화 약 294억 원)을 모집했고, 지역 특산품(멜론)이 인기를 끌면서 파산 당시 부채 632억 엔을 51억 엔으로 줄였다고 한다.
② 가고시마현 서쪽에 위치한 미나미사츠마(南さつま)시는 3만 명 내외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과소지역 중 하나다. 고향납세 수입이 꾸준히 증가해 2019년 이후 40억∼50억 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22년 수입액은 53억 5000만 엔(한화 524억 원)으로, 시 전체 예산의 25%가 넘는 돈을 고향납세로 모았다.
③ 미야자끼현 남서쪽에 위치한 미야코노조(都城)시는 고향납세 최강 도시 중 하나다. 2022년 납세수익이 약 196억 엔으로, 1765개 지자체 중 가장 많은 돈을 모금했다. 이 돈으로 6세 미만 아동 보육료, 중학생 미만 의료비, 임산부 검진비를 무료로 지원하는 3무(無) 정책을 펴고 있다. 2016년에 7명에 불과하던 이주자 수는 2023년에 439명으로 늘었는데, 이 중 6할이 20∼30대 청년들이라고 한다.
④ 홋카이도에 있는 산골마을 가미시호로(上士幌)는 면적의 75% 이상이 삼림으로 덮여 있다. 인구 유출도 심각해서 2015년에 5000명 선이 무너졌다. 쇠락해 가던 이 마을을 살린 건 고향납세다. 매년 15억 엔 이상의 기부금이 모이면서 보육 환경을 개선하고 이주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관계 인구를 늘리면서 4년 만에 인구 5000명을 회복했다고 한다.
큰사진보기홋카이도 가미시호로초(町) 고향납세 홍보 누리집 (www.furupay.jp) 고향납세 제도 안내와 답례품 종류 등 기부 방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음
▲홋카이도 가미시호로초(町) 고향납세 홍보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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