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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공성에 대한 개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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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필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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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공성에 대한 개념화
김필두(한국지방행정연구원 자치분권연구센터 소장)
문재인 정부의 국정시책 100대 과제 중 12번째 과제인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가치 기본법」에서 ‘사회적 가치’는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가치라고 하여 핵심 키워드로 공공성을 들고 있다. “세월호 사고, 최순실 국정농단, 재벌사주 갑질, 공기업 채용비리, 국회의원의 특활비 전용, 법원의 재판거래 의혹, 검찰의 사법농단···등등은 공공성의 부재가 낳은 상처들이다”(경향신문, 18.7.26). “사회적 가치실현법 제정 목적은 공기업의 공공성 회복이다”(오영식 코레일 사장). 이상과 같이 공공성이라는 용어는 정부의 정책, 국회 등의 입법과정, 학계, 시민사회, 언론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익숙한 용어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공성은 OECD국가 중 꼴찌로 나타났다.
자료 : 공공성의 회복은 경제도 살리고 사람도 살린다, 경향신문, 2018.07.26
정치권, 언론, 학계, 시민사회 등이 한 목소리로 공공성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정작 현실은 공공성의 가치가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지금까지 공공성에 관한 논의의 대부분은 서구사회의 이론을 통하여 받아들인 개념을 공공성의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의 공공성 논리가 한국사회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여 서구식 공공성이 우리사회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동양과 한국(특히 조선)의 공공성에 대한 개념화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공공성의 개념을 정의하는데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공(公)과 사(私)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공을 생각할 때 사를 전제하고, 사를 생각할 때 공을 전제로 하는 사고의 틀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공공성을 개념화할 때에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거나 사적인 것과 구별되는 공적인 것의 특성들을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존 롤스(John Rawls)는 공공성을 ‘자유스럽고 평등한 시민정신’(the reason of free and equal citizens)으로 정의하였다. 반면에 공공성의 개념을 가장 좁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공공성을 단지 정부나 공공기관의 역할로 보고 있다. 절대 왕정 시대의 정점에 있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짐은 곧 국가다”라고 말하면서 군주와 국가를 동일시하였다. 군주 혹은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 곧 공공성을 가진 일이 되었다.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라서 군주의 권력행사를 수단으로 실현되었던 절대주의적 개념의 공공성에서 군주 1인이 아닌 다수의 민중에게 이들이 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정의하게 되었다. 비록 공공성의 주체가 1인의 군주에서 다수인 시민사회로 바뀌었지만, 주체(1인이건 다수건)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공공성이라는 개념정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준에 따라 다수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것이든 도구로 삼아 사람을 감시하고 교육하여 질서를 만드는 것이 공공성을 실현하는 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필요적인 인식능력인 이성은 자유 공론적이고 공개성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사용하여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였는데, 그 대상에게 공공성을 부여하는 것이 법과 도덕이라고 하였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공공성은 공개성을 기본으로 한다. 공중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므로 가능한 가장 넓은 공개성을 가지는 것이 공공성의 원칙이다. “우리가 듣는 것을 듣는 타인의 현존으로 인하여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의 실재성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하버마스는 이기적인 개인들로 가들찬 시민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도록 통합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안 및 정치적인 문제들을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기준이 공공성이다. 마이클 센델은 공동체주의 관점에서 공공성의 핵심은 정의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의가 사회 구성원의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혹은 사회 구성원 각각의 자유로움을 보장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에 좋은 영향으로 끼쳐야 하는지 등이 공공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공(公)”은 공통된 그릇(公器)을 함께 관리(共有)하고 함께 사용(共用)하는 것이라고 동양사회에서는 규정하고 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공공성을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강을 함께 관리하고 함께 사용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법이란 천자가 천하 백성과 함께 공기를 공유하고 공용하는 방도이다”라는 장석지의 말을 인용하여 공공성의 개념을 만인의 이익에 대한 공론(公論, 共論)이라고 정의하였다. “법이란 천하고금이 공을 공유·공용하는 방도이지, 1인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고려 공양왕 때와 조선 세종때 간관들이 상소하였다. 조선의 영·정조대에 이르러 ‘공공’이라는 용어는 조정회의나 상소 등에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영조-40여건, 정조-70여건). 고종 때에도 익숙하게 사용하였다.
조선의 공공성은 『민본(民本)』과 『민국(民國)』이라고 할 수 있다. 『민본(民本)』은 조선 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이 내세운 건국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민본은 ‘書經’의 민유방본(民惟邦本)에서 인용한 것으로 “백성은 가까이 친애할 것이나 하대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안녕하다”는 우왕의 훈계를 담은 사상이다. 민본주의는 하늘과 그 상대자인 백성의 화합을 나타낸 사상으로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을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 삼아서 하늘과 백성이 서로 통하고 하나가 되는 사상이다. 이 때 하늘과 백성을 연결해 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 군주이다. “군주는 하늘이 주는 자리요, 동시에 백성이 주는 자리이다.”라는 맹자의 말처럼 군주에게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도록 천명이 내려지고, 그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만민을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정도전은 여기에 재상을 끼워 넣었다. 왕은 천명을 받은 사람이요 민심이 열복하는 통치자이지만, 정작 정치의 실제에서는 국가의 원수(元首)로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러야 한다고 정도전은 주장하였다. 왕이 하는 일은 재상 한 사람을 올바로 고르는 일뿐이고, 선택된 재상이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이다. 재상은 국가 중대사에 관하여 왕과 협의해야 하지만, 대개는 최고의 정책결정권자, 또는 정책집행자로서 강력한 권한과 지위를 가진다. 따라서 정치는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에 평범한 일반 백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민본이 백성은 일방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통치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민국은 일반 백성을 국가의 주인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18세기 이후 민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의 향촌사회는 양반층이 주도하는 향약 질서 중심에서 벗어나서 일반 농민들이 주도하는 두레 중심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양번 등 농업생산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형성된 농경공동체인 두레 조직은 양반사족들의 향약적 지배체제에서 벗어난 농민들의 자치조직이었다. 농민들의 지위 향상과 더불어서 외거 노비들이 도시로 다라나 상공인들의 비호아래 임금노동자로 변신하고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라서 전통 사대부의 기득권에 고통받는 소민(농민, 행방노비, 천인 등)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국가의 공공성)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 등장한 것이 민국사상이다. 왕가와 사대부가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국가”에서 “가”를 바리고 인민(民)과 국왕(國)이 주인이 되는 “민국”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민국(民國)』이라는 용어는 숙종 때에 처음 등장하였다가 영·정조 때에 이르러서 널리 사용되었다. 영·정조 실록에는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고 백성은 나라에 의지한다”라는 귀절이 자주 등장하였다, 영조는 “백성을 위하여 임금이 있는 것이지 임금을 위하여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백성의 우위를 천명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민을 공공성의 도구로 활용하였지만, 18세기 영·정조 대의 ‘민국’시대에 와서 민은 공공성의 주체로 자리 잡게 된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 민은 ‘보국안민’, ‘척왜양’ 등의 기치를 들고 공공성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특히, 만민공동회의 중심에는 민이 있었으며, 동학혁명 당시 민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민이 주도하는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아상과 같은 민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공공성 실현의 전통은 오늘날 주민자치회를 통하여 재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John Rawls(1993), Political Liber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박영도(2011).아렌트, 하버마스, 성찰적 공공성:사회인문학적 고찰 東方學志 제155집
백완기(2013).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의 개념정립과 역대정권을 통한 정착화 과정(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 제52집 1호
임의영(2010). 공공성의 유형화, 한국행정학보 제44권 제2호(2010 여름)
황태연외(2016). 조선시대 공공성의 구조 변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